정말 U-17(17세 이하) 여자축구 월드컵에서 우리나라 태극 낭자들이 우승컵을 차지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26일 오전 7시 트리니다드 토바고의 해슬리 크로퍼드 경기장에서 한국은 일본과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接戰) 끝에 5-4로 승리하는 광경은 그야말로 감동의 대 드라마였습니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가에는 이슬이 맺혔습니다. 일본 격파의 포문을 연 첫 골을 성공시킨 이정은(17)이 경기가 끝난 뒤 금메달을 받는 시상대에서 뒤로 쓰러져 버렸을 때, 태극 낭자들이 얼마나 힘든 경기를 치루어 냈는지를 생각하면 다시한번 가슴이 울컥거립니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주최한 대회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이 우승을 차지한 것은 남녀 통틀어 17세 이하 여자 대표팀이 사상 처음이자, 1882년 축구가 한국 땅에 처음 선보인지 128년 만에 이루어 낸 일대 사건입니다.


이번 U-17여자월드컵에서 우리나라 여자축구 대표팀의 모든 선수들이 다 잘했지만, 대회 MVP(골든볼)와 득점왕(골든부트), 우승컵을 모두 품에 안는 3관왕의 영예를 차지한 여민지(17·함안대산고) 선수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민지 선수는 명서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축구화를 신은 뒤 7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축구일기를 써 왔다고 합니다. 대학노트로 6권에 민지의 축구일기에는 명언과 좌우명, 일과 등이 빼곡히 적혀있을 뿐만 아니라, 소녀답게 좋아하는 국내·외 스타들의 사진을 붙여가며 먼 훗날 성공한 자신의 미래를 꿈꾸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해 온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여민지의 축구 일기에는 포지션과 이에 따른 필요한 플레이 방향, 공수 전환 루트를 여러 가지 색연필로 그려가며 상세히 분석해 축구 지도자가 작성한 전술노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드리블이 너무 많아진다. 페널티지역에서는 주고 받는 플레이를 하자' - 5월 26일자
'디딤발이 볼을 잘 따라다녀야 한다. stop & start를 할 때(멈추고 설때)에는 몸을 휘청거려 수비수를 속여야 한다' - 5월 13일자


특히, 스페인 경기 후, 사상 첫 결승 진출을 확정 지은 9월 22일 경기 후기는 이 어린 소녀가 얼마나 냉철하고 축구지향적인 소녀인지를 잘 보여준다. 골을 넣으며 환호를 받아지만, 정작 자신은 그날 일기를 혹평으로 채운 것이다.

"골도 기록하고, 어시스트도 했지만 오늘 경기는 정말 못했다. 내게 점수를 준다면 30%도 못 줄만큼!", "잔디가 미끄러운 것도 생각 못하고…(중략)…주위를 살피지 못해서 허둥지둥대기도 했고 실수도 많았다" 

"결승에서는 실수도 줄이고, 미리 상황 봐두고, 드리블도 자신있게 하고, 쉽게쉽게 플레이 해야할 거 같다"

“민지가 일기를 쓰는 걸 유난히 좋아했다. 그날그날 훈련 내용을 되돌아보고, 부족한 점, 느낀 부분들을 조금씩 채워가는 데 맛을 들인 것 같다”고 말하는 민지의 아빠 여창국(45) 씨는 경남 김해시 자택 거실에 딸의 트로피, 상장 등과 함께 딸이 쓴 여러 권의 일기를 소중한 보물로 간직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 결승전 첫 골을 터뜨린 이정은 선수가 '부적'처럼 달고 다닌 '암기 메모'도 함께 공개됐는데, 그 내용을 보면 이번 대회를 임했던 어린 소녀들의 철저하고도 눈물겨운 자기노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정은 선수는 일본전을 앞두고선 다음과 같이 쓴 3장의 메모지를 작성했다고 합니다. '항상 주위를 살펴라', '경기장에서 필요한 말(간다, 돌아서, 리턴 등) 많이 하기', '볼 받으며 순간적으로 튀어나가는 움직임을 하면서 주변 상황 체크' 

이 얼마나 자기반성이 철저한 소녀들입니까. 그래서 더욱 우리들의 어린 태극 낭자들이 한없이 자랑스럽고 대견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아마도 그 누군가가 여민지의 축구일기를 미리 보았다면, 우리나라 U-17여자 대표팀이 이번 월드컵에서 우승할 것이라고 틀림없이 예상할 수 있었을 겁니다.

자아성찰적인 꼼꼼한 기록은 승리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전장중에 읽은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도 틀림없이 이순신의 조선해군이 일본과의 대해전에서 필승하리라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신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의 어린 태극 낭자들은 새로운 역사를 계속 써내려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내 정신을 추스린 임씨는 여민지 선수가 명서초등학교 6학년 시절입었던 유니폼을 들어보이는 어머니 어머니 임수영씨. 유니폼에는 2005년 11월 11일 여민지가 쓴 '세계무대 Best One 찜, 최고의 MF 여민지'라는 글귀와 함께 자필 사인이 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