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삼호수의 몽환적 풍경은 산수화가 되고

엊그제, 모처럼 보엠님과 안성 고삼호수에 다녀왔습니다. 김기덕 감독님의 <섬>(2000)의 오픈 세트장으로도 유명한 고삼호수는 끝 간 데 없는 잔잔한 물결이 만들어 내는 고요한 수묵 빛 풍경이 일품입니다. 검붉은 해가 호수 안으로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갈 때의 그 몽환적 풍광은 그대로 산수화가 됩니다.

해질녘 호숫가에서 세월을 낚고 있는 강태공들의 실루엣을 보노라면, 하늘과 호수는 태고 적부터 서로 그렇게 마주앉아서 바람의 언어로 별과 대지의 이야기를 도란거려온 듯합니다. 수천만 년 전 누군가도 석양에 타는 저 하늘을 보며 바람의 그 이야기에 귀 기울였을 법한 풍경입니다.

고삼호수가 있는 마을 이름도 꽤 낭만적입니다. 월향리……. 밤안개 자욱한 호수가 외롭고 이지러진 달빛을 머금기 시작하면 호반이 품어 낸 비석섬이나 동그락섬, 팔자섬의 풀숲 어디선가 물오리떼의 퍼덕거림이 들려오는 듯 합니다.

보엠님은 좌대에서 호수 아래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섬섬옥수로 차오른 물을 찰랑찰랑 거렸습니다. 승진기념으로 갔지만, 냉철하신 보엠님의 마음은 언제나 한결같아 고삼호수가 얼마나 깊은지 모르듯이 그 마음의 속 깊이를 알 수 없었습니다.

“보엠님 승진 축하드려요"
 “그래, 먼동이 터오면 호숫가를 한번 돌아보고 가자구나”
 “기쁘지 않으세요?”
 “흑기사가 있어 조금 빨리 승진했을 뿐, 바람이 차다. 자, 독주나 마시자”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이따금 적막을 깨는 좌대에서 보엠님은 담배를 폐부 깊숙이 빨아들였습니다. 뿌지직 소리를 내며 타들어가는 빨간 담뱃불에 챙랑한 별무리가 아른거렸습니다.

“저기 물그림자가 비치는 섬은 용이 비상한 기념비를 세웠대서 비석섬이라고 한대요.
이제 승진한 기념으로 우리끼리 저 섬을 보엠섬이라 부르기로 해요“
 “호명은 어떻든 중요하지 않아. 그저 저 섬이 되고 싶어.
서어ㅋ운, 마음 단단히 먹고 있어, 같이 일하게 될 때까지…….”

보엠님은 늘 이런 식입니다. 잔잔한 호수의 물비늘보다도 더 감정의 일렁임이 없습니다. 내색 없이 존경을 하면서도 세상을 사는 모습이 안 돼 보여 마음이 아프기 일쑤였습니다. 기쁜 얼굴과 슬픈 표정을 거의 본 적이 없으니까요.

보엠님의 완벽을 향한 열정과 감언이설에 대한 지나친 경계는 반목에 휩싸이기 일쑤여서 위태롭기 그지없었습니다. 눈부신 스펙과 화려한 외모도 시기의 대상이 될지언정, 장점은 결코 되지 못했습니다. 보엠님은 도리어 스펙도, 볼품도 없는 내가 그런 보엠을 닮은 것 같아 적이 염려되는 모양이었습니다.

이른 아침, 어둠에서 완연히 깨어나지 않은 부스스한 호반을 옆으로 끼고 돌아오면서 새벽 물안개의 부서짐을 못내 안타까워했습니다. 얼마 뒤 보엠님은 대평정(大平靜)이라는 아우라의 장막 속에 박제될 수밖에 없음을 잘 알면서도 보엠님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 간절했습니다. 멀리서 지켜보는 수밖에 없지만.

보엠님이 액셀러레이터를 강하게 밟자, 마치 우리와 한 몸이라도 되려는 듯 차는 강한 열기를 내뿜어며 더욱 리드미컬하게 착 달라붙습니다. 눈부신 아침 태양이 시야를 빠르게 부딪치며 흩어지는 순간, 보엠님이 아주 잠깐 미소를 살짝 지어주었습니다. 그런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맞습니다. 호명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용이 날아오른 그 섬 자체가 되고 싶다는 말뜻을 돌아오고 나서야 어렴풋이 깨닫게 됩니다. 보엠님이 왜 한적한 고삼호수를 선택했는지도. 하지만 보엠님의 승진을 마음속으로나마 진정 축하드리고 싶습니다. 축하해요! 보엠!